사람들은 모든 매체에 스토리를 실어보내길 좋아하지만, 비디오 게임의 스토리텔링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책처럼 텍스트를 길게 넣었다간 아무도 안 읽기 십상이고, 영화처럼 시간 순으로 배열하자니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게임의 진행 속도가 달라질 수 있어 문제입니다. 이미지와 텍스트를 함께 쓰며 사용자가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만화의 스토리텔링에서 응용할 수 있는 방법이 많겠지만, 칸 분할과 칸 사이의 여백을 게임에 바로 적용해내긴 또 쉽지 않죠.

최근 즐긴 툼 레이더에서는 현재 게임에 쓰이고 있는 대부분의 스토리텔링 방법들을 사용하면서도, 굉장히 영리하고 효과적으로 쓰고 있더라고요. 사실 텍스트 외에도 이미지나 사운드, 그외 이펙트 등을 통해 전반적인 분위기로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이 최근의 추세이고, 툼 레이더는 그런 스토리텔링도 잘하고 있지만, 이 글에서는 ‘텍스트 스토리텔링’만으로 주제를 한정해서 사례를 뽑아보겠습니다.

1. 독백: 주인공-주인공 2013-09-01_00036툼 레이더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방식입니다. 게임 필드에서 특정한 이벤트(플레이어가 특정 지점에 도달, 플레이어가 특정 행동을 성공/실패시)에 따라 주인공의 음성을 재생하는 방식인데요. 소설로 따지면 1인칭 주인공 시점에 해당할 텐데, 현재 주인공의 심리, 기억, 주변 상황, 다른 인물과의 관계 등을 주인공 시점에서 서술해주기 때문에 주인공의 심리에 더 몰입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독백을 너무 많이 쓰면 주인공이 너무 수다스러워진다거나 진지한 상황에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등 몰입을 오히려 해칠 수도 있을 텐데, ‘낯설고 비우호적인 섬에 조난되어 혼자 생존을 걱정하는 상황’에서 라라의 독백은 성격이나 게임 분위기에 잘 맞았던 것 같아요.

2. 대화: 주인공-타인 (같은 공간)2013-08-29_00008주인공과 타인의 대화는 독백에 비해 훨씬 자연스럽고, 실을 수 있는 이야기의 종류와 양도 많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의 대사를 플레이어가 따로 선택하지 않고 스토리 작가가 구성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임에서는, 플레이어는 플레이를 잠시 중단하고 마치 영화처럼 대화를 구경할 수 밖에 없습니다. 툼 레이더와 같은 3인칭 슈터 게임, 게다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라라 혼자 나오는 게임에서는 더더욱 그렇고요. 그래서, 이런 대화는 모두 컷씬으로 처리하되 굉장히 제한적으로 사용하더라고요.

3. 대화: 주인공-타인 (다른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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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라라는 대부분 ‘무전기’를 통해서 타인과 대화합니다. 고립된 섬에서 혼자 생존하는 설정에 굉장히 잘 맞는 것 같고요. 이를 위 화면과 같이 컷씬에서 사용하기도 하고, 게임 중에서 긴 길을 걸어간다던가 할 때에 쓰기도 합니다. 다른 TPS 게임에서 많이 사용하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무전기라는 수단을 통해 게임 플레이 중에 굳이 컷씬으로 넘어가지 않고 현재의 플레이에 충실하면서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건 시스템적으로도 매력적이고 게임 설정과도 잘 맞는 느낌이었습니다.

4. 대화: 타인-타인 (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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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야기가 풍성해지려면, 조연들의 뒷얘기들이 힘을 보태줘야 하고, 가끔은 ‘주인공이 없는 곳’에서도 이야기가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대부분 영화처럼 지켜보는 형태, 즉 컷씬이 되어야겠죠. 하지만,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교차 편집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영화와는 달리, 주인공을 조작하는, 더구나 주인공에 최대한 몰입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툼 레이더에서는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 컷씬을 만들어 넣을 곳이 뾰족하지 않습니다. 위 화면은 게임 초반부에 ‘미리 찍어놓은 비디오 카메라 영상을 라라가 틀어보는 것’으로 해당 컷씬을 훌륭하게 풀어놓은 부분입니다. ‘현재의 라라에게 충실한다’는 목표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회상 장면을 관찰자 시점에서 볼 수 있어서 인물들의 뒷얘기를 볼 수 있게 해놨더라고요. 정말 영리하게 사용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5. 대화: 타인-타인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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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라라가 맞서 싸우는 적들의 얘기도 들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적들의 과거는 어떤지, 라라의 활약 덕분에 현재는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다음 얘기는 무엇이 될 지 적들의 입을 통해 말해줘야 이야기가 좀 더 입체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들의 얘기는 전달하기 더 어렵습니다. 주연급 적이라면 컷씬을 통해 라라와 같이 얘기를 주고 받거나 라라가 관찰할 수도 있겠지만, 자잘한 적들도 모두 컷씬으로 처리하면 비용도 문제고 게임 플레이가 너무 자주 끊기게 되니까요. 툼 레이더에서 이 부분은 무전기와 비슷하게 처리했습니다. 플레이어가 특정 지역을 지나가야 하는데, 그 주변에 있는 적들이 자신들끼리 대화를 하고, 플레이어는 그 대화를 엿듣는 형태로 말이죠. 다른 게임에서도 흔히 쓰는 방식인데, 이걸 참 좋게 썼더라고요. 전반적인 게임 플레이가 적들에게 덜 들키는 것을 권장하고 있어서, 적들의 얘기가 들려오면 우선 발각당하지 않게 한 번 긴장하게 되면서 동시에 ‘엿듣는다’라는 행위 덕분에 은신/잠행/암살 중인 라라에게 더 몰입하게 만들어줍니다. 게임을 강제로 일시 정지할 필요도 없고, 대화 중인 적을 죽이면 바로 대화가 끊기고 전투가 시작되니, 좀 더 현실감을 주게 만들더라고요.

6. 독백: 타인의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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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화자가 많을수록 풍부해집니다. 하지만, 회상 컷씬이나 라라가 엿듣는 대화 외에 라라가 아닌 타인이 게임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툼 레이더에서는 맵 곳곳에 등장인물들의 일지를 숨겨놓고, 여기에 각자의 1인칭 시점에서 짧은 얘기들을 적어뒀습니다. ‘맵에 문서 흩어놓고, 이야기 조각들로 큰 이야기 맞추기’는 다른 게임에서도 많이 쓰는 방식이지만, 툼 레이더에서는 이야기의 질이 좀 더 좋았던 것 같아요. 해당 시점에서 궁금했던 얘기들인데다가 이야기도 흥미롭게 쓰여 있어서, 발견한 일기는 모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 외에 후반부에 조연들과 함께 모였을 때 주인공이 NPC를 눌러 대화하는 방식도 약간 있었지만, 별로 인상적이지 않은 데다가 어쩔 수 없이 넣었단 느낌이 있어서 그 얘긴 통과해볼게요.

ps: 대작 싱글 게임에서 이런 사례들을 접하고 나면, 멀티플레이어 게임이나 모바일 게임에서는 스토리텔링을 어떻게 잘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돼요. 대작 싱글 게임의 몰입감을 따라가기는 어렵겠지만, ‘타인과 같은 시공간에서 함께 하는’ 멀티플레이어 게임이나, 기기의 목적 자체가 ‘타인과 의사소통’인 모바일에서는 싱글 게임에서는 하지 못할 스토리텔링이 가능할 것도 같아서요. 하긴 그런 매체의 특성에 맞춰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낸 것이 성공한 소셜 게임의 비결이기도 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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