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2011년 12월에 썼던 글을 옮겨옵니다.

간만에 재미있는 게 있어서 블로그로 남겨 봅니다. ‘스탬프 쿠폰과 게임이 무슨 상관이야?’ 싶기도 한데, 잘 생각해보니 게이미피케이션과도 닿는 듯하고, 퀘스트 디자인에도 배울 점이 있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좀 더 생각해서 정리해봅니다. 🙂

시작은 커피였어요. 오후에 잠시 몸도 움직이고 몸에 카페인도 넣을 겸, 커피를 하루에 한 잔 정도 마시고 있습니다. 회사 건물 1층에 두세 군데 있는 커피집 중 처음 갔던 곳을 별 생각없이 계속 가는데, 몇 주 전에 그림과 같은 ‘프리퀀시 쿠폰’을 한 장 주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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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 마실 때마다 스탬프 찍고, 그래서 몇 잔 마시면 무료 한 잔 주고, 다 마시면 상품(다이어리)을 주는 그런 흔한(?) 쿠폰이에요. 그런데, 이 쿠폰을 받기 전에는 그냥 생각나면 커피 사러 가곤 했는데, 쿠폰을 받고 나서는 마음 한 편으로 기다리고 있다가 ‘아, 이제 오늘 도장 찍으러 가야지.’하면서 의식적으로 움직이게 되더라고요.

무료 커피와 다이어리라는 ‘경제적 보상(외적 보상)’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는데요. 경제적으로 따지자면 커피는 안 마시는 게 오히려 돈을 아끼는 쪽이고, 다이어리는 별도로 1만 6천원 정도에 팔긴 했지만, 어차피 안 쓸 거라서 이것도 큰 의미는 없었죠.

‘외적 보상도 중요한 게 아니라면, 대체 왜 나는 매일 같이 내려와 커피를 사고 쿠폰을 내밀고 스탬프를 받는 귀찮은 짓을 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생각해보니 제게는 ‘재미’라는 내적 동기가 있다는 걸 깨달았고, 어느 순간부터 대단찮은 이 일을 일종의 ‘퀘스트’로 받아들이고, 완수하고자 하는 제 자신이 보이더라고요.

그렇다면, 어디가 재미있고, 어느 부분이 퀘스트 같은 지 살펴봐야겠더라고요.

우선 모든 규칙을 다 없애고, ‘게임 디자이너(이벤트 기획자)가 의도한 플레이어(고객)의 행위’에서 가장 본질적인 부분만 남겨 보면 다음과 같이 아주 밋밋한 ‘마일리지’가 남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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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20잔의 커피를 마시는 아주 단순한 행위죠. 이대로는 그냥 마일리지나 포인트 쌓는 것이지, 어떤 재미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목표’와 ‘외적 보상’을 삽입합니다. 다음 그림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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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잔 구입’이라는 커다란 목표(goal)를 주고, 여기에 다이어리라는 보상을 얹습니다. 20잔까지 아무런 보상 없이 전진하기는 쉽지 않으니까, 작은 목표 ’10잔’을 주고, 여기에 무료 음료라는 보상을 또 하나 얹습니다. 여기까지면 그럭저럭 ‘보상 프로그램’으로는 괜찮아 보입니다. 큰 목표, 작은 목표를 설정해줬고, 각 목표에 대한 외적 보상을 마련했죠. 하지만, 이게 재미있나 하고 보면 여전히 그렇지 않죠(게이미피케이션 관련 대부분의 퀘스트들이 여기에 머무르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아직은 너무 밋밋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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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추가된 룰이 ‘시간 제한’입니다. 시간 제한이 있기 전까지는 그냥 아무 때나 생각날 때 천천히 한두 잔씩 사다 보면 언젠가는 달성하게 될 목표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시간 제한이 들어오면서 한정된 날짜 안에 몇 회 이상 먹어야 하는 계산을 하게 됩니다. 제가 쿠폰을 받은 게 아마 11월 20일 부근이었을 텐데, 12월 31일까지 출근 일수로 따지면 약 30일 정도가 남아 있었고, 그렇다면 대략 사흘에 두 번 정도 커피를 마시기만 하면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퀘스트에 맞춰 제 행동을 ‘계획’하기 시작한 것이죠. 하지만, 이대로는 여전히 좀 밋밋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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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재미있었던 부분이 바로 이 ‘특별 메뉴’ 룰이었어요. 물론 이벤트 기획자 입장에서야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크리스마스 음료를 프로모션하는 부분이 컸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이게 일종의 ‘도전 과제’ 같은 느낌을 주더라고요. 평소에는 아메리카노나 오늘의 커피만 마시는 편인데, 그대로는 이 퀘스트를 달성할 수 없죠. 평소 습관과는 다르게 일탈해야만 이 퀘스트를 완수할 수 있는 건데, 밋밋하고 반복적이고 지루해질 수 있는 일상에서 자발적으로 습관을 바꾸는 게 꽤 재미있는 일이거든요.

마치 Jetpack Joyride에서 도전 과제하는 것 같았달까요? Jetpack Joyride에서 저는 늘 천장 쪽으로 조종해서 다니는데 ‘바닥의 과학자를 25회 터치해라’같은 도전 과제가 나오는 바람에, ‘그럼, 아래로도 해볼까?’하는 식으로 움직여봤는데, 그게 좀 새로운 느낌이 들면서 반복 플레이의 지루함을 덜어줬거든요.

그런 것처럼 늘 ‘오늘의 커피 한 잔’으로 고정했던 제 습관을 바꿔야 하다 보니, ‘그렇다면, 저 특별 음료들은 언제 마실까? 내가 직접 마실까?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사주고 스탬프를 찍을까?’하는 식으로 마찬가지로 제 행동을 계획하게 되더라고요. 실제로는 다음 그림처럼 마셨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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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한 달 남짓한 기간에 끝낼 수 있었는데, 앞서 적은 것처럼 은근히 재미있었어요. 그냥 단순 반복일 수 있었는데, 장기/단기 목표가 주어지고, 시간 제한이 들어가고, 일탈 행위가 있으니, 이 자체로 하나의 게임이 되더라고요.

‘게임이라니 좀 지나친 것 아니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버나드 수트의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것은 굳이 안 해도 되는 장애물을 극복하려고 자발적으로 시도하는 것이다’라는 정의를 보면, 이건 이미 충분히 게임이라고 부를 만하죠.

여기에 제인 맥고니걸의 ‘게임의 4대 구성요소’ 프레임도 가져와서, 이번 커피 쿠폰 쪽에 넣어보면 다음과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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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20잔의 커피 구입(크리스마스 특별 음료 두 잔 포함)
[룰] 12.31까지, 특별 음료 두 잔 포함
[피드백 시스템] 한 잔 구입할 때마다 찍히는 스탬프와 쿠폰 용지
[자발적인 참여] 강제가 아니며, 제가 원하면 안 할 수 있었음

제대로 만족하는 것 같죠?

끝으로 ‘마일리지 식 단순 반복’과 ‘프리퀀시 쿠폰같은 재미있는 퀘스트’를 대조해봤어요. 확실히 흐름이 단조롭지 않고, 변화가 많이 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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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퀘스트 디자인에도 충분히 응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플레이어더러 그냥 단순히 어떤 행위를 스무 번 하라(소위 반복 노가다)는 것 대신에, 조금만 더 정성 들이고 기획하면 플레이어가 자발적으로 재미있게 할 수도 있게 꾸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에요.

물론, 저부터 그렇게 노력해봐야겠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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