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앞부분이 링크로 떠서 본의 아니게 스포일러가 되는 걸 막기 위해, 일부러 의미 없는 문장들을 마구 넣어 봅니다.

제목에 대해 부연해 설명하자면, 어디까지나 개인 추측입니다. 영화 제작 과정이나 공식 설정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고, 이 글을 쓰면서 따로 찾아보지도 않았어요. 이 글은 그저 좀 더 영화 킹스맨에 대해, 그리고 발렌타인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팬심으로) 수다를 떨고 싶은 글입니다. 게다가 이곳은 어쨌거나 제가 OO디자인을 공부하는 곳이니까, 자료도 부족하고 그냥 제 추측으로 글을 쓰더라도 넘어갈 수 있겠죠. 스포일러만 조심하면 말예요.

스포일러 두 번 경고했으면 충분하겠죠? 그리고 의미 없는 앞부분도 이만하면 충분할 거에요.

그럼, 이제 진짜 글을 시작해보죠.

kingsman

매튜 본 감독의 전작인 ‘킥 애스’가 전형적인 히어로 영화를 비트는 척하던 고전적인 히어로 영화라면, ‘킹스맨’은 꽤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스파이 영화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악역 발렌타인이 있습니다.

잠깐, 킹스맨은 조각 같은 몸매의 아저씨들이 정장 입고 멋지게 싸우는 영화 아니었나요? 21세기에 원탁의 기사 이름들을 코드네임으로 쓸 정도로 고루하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매력 있는 비밀 결사 조직 킹스맨이 영화의 중심 아닌가요?

하지만 악역 또는 조연이 매력 있어야 주인공이 더 빛나는 법이죠. 그런 면에서 악역 발렌타인은 굉장히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입니다.

1. 발렌타인은 고전적인 악역입니다.

제가 보기에 감독은 정말 고전적인 스파이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주인공을 고전적으로 만들긴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역사의 어두운 곳에서 수십 년 동안 세계 평화를 위해 봉사해온 귀족 출신 비밀 결사 조직에게 정장을 입히면 되거든요.(물론 실제 구현은 말보다 어렵겠습니다만..) 하지만 악역이 이에 맞춰주지 않으면, 영화 트리플엑스의 도입부에서 락 클럽에 턱시도와 나비 넥타이를 맨 채 잠입했다가 죽는 ‘시대에 뒤떨어진 스파이’가 되겠죠.

그래서는 안 됩니다. 고전적인 주인공에 맞춰, 악역 또한 고전적이어야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근접할 수 없는 오지의 눈 덮인 산 깊숙한 곳에 미로 같은 통로를 뚫어놓은 비밀 지하 기지에서, 스타워즈의 제국군을 닮은 듯한 사병들과 지상 최강의 무력을 자랑하는 오른팔의 경호를 받으며,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는 감금한 채 미리 선별한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인류 멸망을 카운트 다운하며 축배를 드는… 바로 그런 악역 말입니다.

그게 아마 발렌타인 디자인의 끝이자 시작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2. 발렌타인은 현대적인 악역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악역은 시대에 뒤떨어져 보일 위험도 있습니다. 가까이는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저’의 히드라가 그런 면이 있죠. 지금은 21세기입니다. 우리 진영을 몰살하려는 나치나 냉전 시대의 적 진영을 불러오는 순간, 극의 개연성이 곤두박질칠 겁니다. 테러리스트요? 최근 사람들의 안전에 가장 위협이 되고 있고, 그래서 지난 십수 년 동안 영화 속의 악역을 도맡고 있긴 합니다만… 고전적인 악당에 비하면 그 영향력이 아무래도 국지적이죠. 테러리스트가 전세계 정부/권력의 감시를 피해 또는 암묵적인 동의로 인류 멸망의 스위치를 누를 수 있다는 건 아무래도 상상하기 어려우니까요.

현대의 악당은 전세계 누구에게나 자신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그리고 그로 인해 사람들을 자신의 추종자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동시에 인류 멸망과 세계 정복을 실현할 수 있을 정도의 돈과 권력과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요. 매드 사이언티스트처럼 맛간 면이 있으면서도 정치력과 카리스마를 겸비한 사람 말예요.

그래서 감독의 눈은 실리콘 밸리로 향합니다.

그곳에는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혁신적인 가격으로 제공해서 세계를 열광시키고, 몇 시간 넘게 줄을 기다려 자신들의 물건을 사게 할 만큼 영향력이 세고, 덕분에 전세계 정상들과 교류하는 것도 자유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야구 모자에 간편한 재킷, 운동화를 받쳐 신고, 무대 위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통해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약속하는 발렌타인의 모습은, 언뜻 스티브 잡스나 마크 주커버그를 떠올려도 될 법한 그런 이미지였죠. (영화 속 키노트 디자인이 너무 촌스러운 것만 빼고요. 그런 디자인으로는 일류가 될 수 없었을 거에요. :P)

무대 위에서 키노트로 무료 유심과 통신비를 약속하고 그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잡아주는 시퀀스는, 감독이 ‘킥애스’에서 보여줬던, 히어로의 활약상이 유튜브에 올라가고 히어로가 소셜 미디어로 자기 평판을 관리하는 장면만큼이나 ‘설정이 그럴싸한데?’하는 생각이 들게 하더라고요.

이런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이미지를 한 인물에 갖춰 놓고, 여기에 ‘흑인이다(아무래도 IT 쪽에서 유색인종의 파워는 너무 약하니까요.)’, ‘피를 보는 것을 질색한다’등의 의외성을 끼얹어서 좀 더 입체적인 인물을 만들어낸 것이 현재의 발렌타인이라고 생각해요.

영화 ‘다크 나이트’가 그랬듯, 악당이 깊이 있고 매력적일수록, 또는 침착하게 미쳐버릴수록, 주인공과의 대비가 살아나면서 극의 힘이 세지는 것 같은데요. 게임에서라면 플레이어가 이루려는 바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결국 ‘악역’일 텐데, 어떻게 하면 그런 장애물이 그냥 귀찮거나 짜증나는 게 아니라 그 깊이와 매력에 반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그런 고민도 잠깐 해보게 되네요.

이상 오랜만에 영화 보고 신나서 떠들어본 수다였습니다.

ps: 몇 번 얘기했지만, 이 영화는 ‘킥 애스’와 비교해 보면 더 얘기할 거리가 많은 듯해요. 주인공의 조력자이자 스승이 먼저 죽는다는 것도 같고, 진영이 서로 바뀌긴 했지만 여성 캐릭터에는 슬래셔 속성을 부여한 것도 그렇고요. 제 기준보다 표현 수위가 조금 높은 편이지만 매튜 본 감독의 다음 영화도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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