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성, 인종, 장애: 다양성에 민감해진 장난감 회사들’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볼까 했는데, 글의 주제가 너무 크고 가볍게 적을 수 있는 주제는 아닐 것 같아서, 이번 글에는 최근 눈에 띈 사례들을 몇 가지 적고자 합니다. 이후 힘이 닿으면 컨텐츠 전반이나 게임에서의 다양성 얘기까지 써보고 싶네요.

사례 1: 휠체어 탄 레고 미니피겨

지난 1월 27일, 레고는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국제 장난감 박람회(Internatinational Toy Fair)에서 이번 여름에 출시할 신제품들을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레고 미니피겨 역사상 최초로 ‘휠체어에 탄’ 미니 피겨가 포함되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NPR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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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처럼 생긴 미니피겨인데요. 처음에는 ‘아니, 이게 뉴스거리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어, 그동안 레고에 휠체어탄 미니피겨가 없었나?’ 싶어 놀랍기도 하더라고요.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레고 미니피겨는 1975년 처음 출시되었고 이후 30년간 그 종류만 약 7,000 종에 달한다고 하는데 말이죠.

위의 NPR 기사에 따르면, 레고 그룹에서 휠체어 장난감을 내놓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고 합니다. 영국에서 시작한 Toy Like Me라는 온라인 캠페인에서 전세계 150만 명의 장애아동들이 장난감에서 자신의 존재가 배제되거나 잘못 대표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고, 이에 2만 여명이 함께 청원하는 등 레고에 장애인도 반영해달라는 움직임이 있자, 2015년 여름 레고 그룹은 좀 더 저연령대 라인업인 듀플로의 Community People Set을 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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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들이 다양한 인종, 성별, 직업, 연령대의 사람들에 대해 만지고 놀 수 있게 한 장난감에 휠체어를 탄 인물이 추가된 것인데요. 안타깝게도 이 제품에서 휠체어를 탄 사람은 노인이었습니다. 아래 사진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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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Toy Like Me는 “휠체어가  추가된 것은 반가운 일이나, 레고 전제품에서 휠체어를 타는 유일한 사람이 노인인 것은 대단히 실망스럽다. 휠체어는 65세 이상만 타는 것이냐?”라는 반응을 보이며 이는 휠체어가 나이든 사람만 탄다는 편견을 강화시켜줄 뿐이라고 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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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년 만에 출시되는 것이 위의 미니피겨입니다. 저연령대의 듀플로가 아닌 전연령대의 레고 시티 라인업으로 들어왔고, 노인이 아니고 회색 비니를 눌러쓴 젊은이의 모습입니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장애를 표현해달라는 소비자의 요구에 제대로 반응한 사례라고 볼 수 있겠죠.

사례 2: 게임개발자 바비

한편 1월 28일 마텔 사는 보도자료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바비 몸체를 내놓는다고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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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라고 하면 금발에 푸른 눈, 8등신 백인 미녀를 떠올리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 체형 4종, 피부색 7종, 눈 색깔 22종, 헤어 스타일 24종을 통해 ‘전세계의 소녀들이 좀 더 자신 주변을 반영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 자체도 꽤 재미있고 의미있지만, 제 관심을 잡아 끈 부분은 바로 이번 여름 ‘올해의 직업’ 라인업으로 출시 예정인 ‘게임 개발자 바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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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는 ‘옷/악세사리 갈아입히기’가 주된 컨텐츠이고, 그래서 ‘직업’ 시리즈는 이런 다양한 옷과 악세사리에 딱 맞는 테마입니다. 그래서 대통령, 부통령과 함께 게임 개발자라는 직업이 들어간 게 그리 대수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휠체어 탄 레고’보다는 좀 더 격한 역사가 있습니다.

위키피디아의 computer engineer barbie 항목에 따르면, 2010년 마텔은 바비의 ‘올해의 직업’을 설문조사했는데, 소녀들은 뉴스 앵커를 좀 더 선호했지만, 여성공학자회(Society of Women Engineer)의 캠페인에 힘입어 온라인 설문에서는 컴퓨터 공학자가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에 따라 마텔은 뉴스 앵커와 컴퓨터 공학자 바비 모두를 출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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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세상에 등장한 컴퓨터 공학자 바비는, 여전히 핑크핑크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바비 라인업에 ‘공학자’를 추가하며 나름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요.

문제는 몇 년 뒤 같은 테마로 출판된 책이었습니다. 2013년 출판된 ‘나도 컴퓨터 공학자가 될 수 있어 (I can be a computer engineer.)’라는 책이었는데요. 이 책에서 주인공은 컴퓨터로 이것저것 할 수는 있지만, 실제 프로그래밍은 못한다거나, 다른 사람의 노트북에 플래시 드라이브를 끼웠다가 바이러스로 자료를 모두 날리게 하는 등 이런 저런 사고를 칩니다. 크게 문제된 장면은 바로 다음의 장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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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그린 게임 화면을 보고 그 게임 해볼 수 있냐는 친구에게 “나는 아이디어만 디자인할 뿐이야. 실제 게임으로 만들려면 (아마도 남자일) 스티븐과 브라이언의 도움이 필요해.”같은 말을 하는데요. ‘컴퓨터 공학자 바비’의 컨셉과는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었죠.

2014년 11월 소셜 미디어에서 이와 관련해 성차별적이라는 호된 비난을 받고, 마텔 사는 아마존 등 주요 서점에서 문제의 책을 모두 회수 처리합니다.

그리고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2016년 1월, 바비 역사상 꽤나 큰 분수령이 될 ‘체형 추가’를 발표하면서, 올해의 직업 중 하나로 게임 디자이너를 선보입니다.

이 또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2013년 자신들이 저질렀던 잘못과 그에 대한 소비자의 시정 요구에 제대로 반응한 사례라고 볼 수 있겠죠.

사례 3: 뒤늦게 출시된 레이 장난감

레고나 바비처럼 수십 년 동안 이어온 라인업에 ‘새로운 요구’를 반영하는 것과는 달리, 수십 년 동안 이어온 프랜차이즈에 달라진 사회상을 반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스타워즈의 예인데요. 2015년 말에 개봉한 에피소드 7은 기존의 여섯 에피소드와는 달리, 주인공을 여성인 레이로 놓고, 여기에 조력자인 핀은 흑인으로, 포도 전형적인 코카시안이 아닌 인종으로 캐스팅해 화제가 되었습니다.

영화 개봉과 맞춰 출시한 장난감들은 또다른 의미로 화제가 되었는데요. 여주인공인 레이를 장난감으로는 쉽게 만나볼 수 없기 때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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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주인공도 아니고, 영화 한 편을 멱살 잡고 끌고 갈 정도의 강력한 존재감을 뽐냈던 주인공 레이였지만, 피겨 컬렉션에서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피겨 컬렉션 뿐만 아니라 보드 게임 등 여러 장난감에서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레이는 빠져 있습니다.

데이터 블로그 538에서는 에피소드 7 장난감에서 각 캐릭터의 출현 빈도를 수집해, 레이의 비중이 실제로도 심각하게 낮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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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 카일로 렌이 38종이나 되지만, 레이는 10종 밖에 되지 않아 조연인 핀이나 포보다도 장난감이 적습니다. (여성 캐스팅인 캡틴 파스마가 14종으로 높긴 하지만, 주인공 레이 장난감이 적은 건 여러모로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죠.)

이에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에서 ‘#WheresRey’라는 해시태그를 통해 상황의 부당함을 알렸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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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나마 지난 1월 12일, 디즈니는 레이 피겨를 비롯해서, 레이 라이트세이버 등 관련 장난감을 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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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장난감이 뒤늦게 나온 것에 대해, 디즈니는 보도자료를 통해 “(줄거리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팬들이 깜짝 놀랄 수 있도록 숨겨뒀다”라는 식으로 해명하고 있는데요. 레고 레이 장난감이 지난 9월부터 공개된 걸 생각하면 여러모로 좀 궁색한 변명 같다고 생각해요. 뭐, 레이 장난감이 제때 나왔다면 훨씬 더 장난감 수입이 좋았을 테니, 이런 출시 지연(?)에 대해 디즈니가 더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겠지만요.

다른 회사들보다 좀 더 발 빠르게 대응하긴 했지만, 영화 자체가 달라진 사회상을 미리 반영했던 것에 비해, 장난감 쪽은 소비자들이 요구한 뒤에야 부랴부랴 반응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결론

이 글에서는 레고, 바비, 디즈니의 사례를 통해, (1) 장애나 성별, 인종에 대해 ‘좀 더 제대로 현실을 반영해줄 수 있게 해달라.’는 소비자의 요구가 있고 (2) 장난감 회사들이 이 요구에 늦게나마 제대로 반응하고 있는 모습들을 정리해봤습니다.

이런 경향은 앞으로도 가속화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소비자들의 이런 요구에 제때 대응하지 못하면 시대착오적이라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는 오명은 물론이고, 추가로 얻을 수 있었던 수익조차 챙기지 못할 위험을 안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얘기를 하다 보면, 제가 몸 담고 있기도 하고, 같은 컨텐츠/엔터테인먼트 사업인 게임 업계의 사례들과도 엮어서 얘기해보고 싶은데요. 아직은 힘이 닿지 않아서, 일단은 다음 기회로 미뤄둘게요.

p.s.

이 글에는 함께 적지 못했지만, 좀 더 생각해보고 싶었던 글감으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어요. 시간이 나면 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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