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여름에 쿼티폰 구입

뜬금없지만 모든 일은 ‘You Know Who’s Really Addicted To Their Phones? The Olds.‘라는 와이어드의 글을 읽으며 시작됐습니다. 기사는 ‘십 대가 소셜 미디어를 더 많이 쓴다’는 통념과는 달리, 18-34세 연령대보다 35-49세 연령대가 일주일 당 40분이나 더 많이 소셜 미디어를 쓰고 있다는 조사 결과를 소개하며, 실제로도 중년의 X세대가 밀레니얼 세대보다 휴대폰, 태블릿, PC 모두 더 많이 사용한다는 얘기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이들 중년의 사회적 역할에서 찾죠. 집에서는 가정의 중심으로서 자녀와 노부모와 연락할 일이 많고, 회사에서는 중간관리층으로서 온갖 업무를 확인하고 요청이나 질문에 답하고 수없이 긴 참조 메일을 봐야 한다는 겁니다. 즉 이들은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커뮤니케이션 허브라서 휴대폰을 가장 많이 쓰게 된다는 주장이에요. 물론, 집과 직장을 오가다 보면 별도의 사교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실제로 소셜 미디어를 많이 하기도 한다는 얘기도 있었고요.

그런데 이 글을 읽고 제 생활 방식을 돌이켜 보니, 기사에서 얘기하는 삶이 바로 제 얘기더라고요.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다시 눈을 감기 전까지, 메일, 슬랙, 카카오톡, 문자, 그리고 짬짬이 트위터. 제가 휴대폰에서 하는 건 대부분 커뮤니케이션이더라고요. ‘어차피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중요하다면 그 일을 가장 잘하는 기기가 낫지 않을까? 즉, 텍스트를 입력하기 편한 기기가 필요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여기에 또 다른 생각이 하나. 글이 쓰고 싶었습니다. 이왕이면 긴 글이요. 굳이 노트북이나 데스크탑을 켜지 않더라도, 자리에 누운 채라도 뭔가 더 쓰고 싶었습니다. 물론 다른 휴대폰들로도 트위터처럼 짧은 글 쓰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좀 더 긴 글을 쓰려니 가상 키보드로는 아쉬운 면이 있었거든요. 자기 전에 휴대폰에 이것저것 적으며 생각도 정리하고 싶은데, 가상 키보드로 두드리다 오타라도 나면 생각 흐름이 확 끊겨버렸거든요.

그래서 물리 키보드가 있는 휴대폰이 궁금해졌습니다. 아이폰 나오기 전에 쿼티폰이나 쿼티PDA를 써본 기억이 나기도 하고 말이죠. ‘요즘 시절에 쿼티폰이 나오기나 할까?’하는 호기심에 검색해봤는데 블랙베리 키투가 곧 발매된다는 거예요. 블랙베리는 예전부터 가끔 끌렸는데 아이폰/안드로이드의 메신저, 내비게이션, 뱅킹 앱들을 생각하면 블랙베리 OS를 시도할 마음이 안 들었는데, 이제는 안드로이드 OS로 나오니까 해볼만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키투가 발매되고 써보기 시작했습니다.

물리 키보드: 정체성이자 대체 불가능한 차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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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 런처, 허브 앱을 비롯해서 여러 부가 기능을 넣었다지만, 블랙베리 키투의 정체성이자 존재 이유는 역시 물리 키보드입니다.

예전의 블랙베리를 써본 분들이 좋지 않게 평하는 얘기도 많이 들었고, 실제로 물리 키보드의 크기가 가상 키보드보다 작아서 조금 걱정했지만, 금방 익숙해지고 생각보다 쓸만합니다. 손가락이라기보단 손끝으로 꾹꾹 하나씩 눌러쓰다 보면 가상 키보드보다 순간 입력 속도는 느리기도 하지만, 평균 속도는 꽤 괜찮고 무엇보다 오타가 거의 안 납니다. 덕분에 방해받지 않고 생각을 쭉 적어갈 수 있습니다. 메신저는 물론이고 제법 긴 메일이나 글도 충분히 적을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물리 키보드를 만들어온 회사다 보니, 스마트 키보드나 키보드 영역 전체를 터치 영역으로 인식해 쓸어내리거나 넘길 수 있는 식으로 이곳저곳 편한 노하우도 쌓여있었고요.

그 외에 지문인식, 스피드키도 괜찮았고, 화면이나 성능, 배터리는 2018년에 쓰기에 그리 떨어지는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OS가 안드로이드라서 앱들을 그대로 쓸 수 있다는 건 참 좋았어요.

가장 크게 잃은 것은 화면 부동산…

하지만 잃은 것도 있으니, 바로 화면 부동산입니다. 휴대폰의 크기를 너무 키우지 않으면서 물리 키보드를 넣다 보니, 2018년 휴대폰이지만 화면이 4.5인치밖에 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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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G6와 나란히 놓고 찍은 사진인데요. 기기 자체는 키투가 오히려 조금 더 크지만, 화면 크기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납니다. 절대적인 크기가 작고 그래서 글씨나 이미지도 작게 보이지만 화면 비율도 문제입니다. 위의 사진에서 같은 화면을 띄워 놨는데, 한 화면에서 보이는 정보량이 엄청나게 차이납니다.

가로 화면은 좀 더 심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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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쓰라고 만든 기기가 맞나?’ 싶을 정도로 물리 키보드가 걸리적거리죠. 최근 6인치 이상의 휴대폰들을 쓰다 이 화면을 보면 일종의 박탈감마저 느껴지고요. 사진, 동영상, 게임 등 멀티미디어 콘텐츠의 매력이 엄청나게 줄어듭니다. 저야 어차피 집에 오면 좀 더 화면이 큰 세컨폰을 쓰니 괜찮지만, 키투만 갖고 다니는 사람이면 상당히 괴로울 수 있어요.

그 외에도 이곳저곳 아쉬운 부분이 많아요. 일단 카메라가 총체적 난국이라고 말할 정도로 형편없고, 스피커는 모노에, 무선 충전 안 되는 것도 아쉽죠.

휴대폰 하나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세상이라 휴대폰 하나에 온갖 것을 바라는 시대에 키투의 ‘키보드를 제외한 부분’은 꽤 실망스러운 편입니다.

총평

하지만, 저는 이 많은 단점에도 키투를 좋아합니다. 키투는 커뮤니케이션에 충실한 기기거든요. 화면이 작고 좁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긴 텍스트를 읽기에는 아쉬울 수 있지만, 텍스트를 많이 입력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좋은 기기입니다. 다른 건 별로 매력이 없고 심지어 평균보다 못하지만, 딱 하나를 정말 잘하기 때문에 다른 단점을 참고 쓸 수 있는 그런 기기에요.

MWC 2019를 소개하면서 ‘스마트폰에 키보드가 돌아오고 있다’라는 BBC의 기사가 있긴 했지만, 요즘처럼 멀티미디어가 중요한 시대에, 물리 키보드 휴대폰이 주류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물리 키보드를 가리켜 ‘과거를 향한 향수가 항상 좋은 건 아니다’라는 Verge의 주장에도 동의하지는 못하겠어요. 소비자층이 아주 좁긴 하겠지만, 텍스트 입력이 중요한 사람에게 물리 키보드가 주는 매력은 대체 불가능할 정도로 너무나 강렬하거든요.

블랙베리 쪽은 물리 키보드 휴대폰이 틈새 시장이기 때문에 풀터치 스마트폰으로 주류 시장을 계속 노리려는 것 같지만, 저로선 키투의 후속 모델도 계속 내줬으면 하는 바람이네요. 휴대폰 크기와 물리 키보드는 그대로 유지하되, 노치로 화면을 조금이라도 키우고(노치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키투야말로 노치가 필요한 기기 같아요.), 카메라만 좀 더 쓸만하게 만들어 준다면, 다음 휴대폰도 기꺼이 블랙베리로 선택할 생각입니다.

ps: 보통 이런 글에는 ‘이 글도 블랙베리에서 썼습니다.’라고 적어야겠지만, 그렇지는 않아요. 저는 글을 앞뒤로 여러 번 읽으며 계속 고쳐 쓰는 편이라, 제대로 글을 쓴다면 아무래도 큰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써야 하더라고요. 휴대폰이나 태블릿이 좋아진 건 알겠지만, 일(?)할 때는 여전히 컴퓨터가 필요하달까요. 다만, 중간중간 사진으로도 보신 것처럼, 이 글의 뼈대는 키투에서 짬짬이 메모 앱에 적어놓고 고쳐 쓰며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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