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한 컴퓨터 생활, HP 크롬북 11 G5

2019년 9월, 일 년 정도 쓴 서피스 고를 처분했습니다. (관련 글: 서피스 고 1년 사용기) 그와 동시에 ‘어딘가에 있을 제 영혼의 단짝이 될 노트북’을 찾는 여행이 다시 시작됐죠.

당시 제게 대단한 노트북이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차피 회사에서는 노트북을 쓸 일이 거의 없었고요. 토요일마다 아이를 축구 교실과 미술 학원에 데려다주고, 한 시간 남짓 카페에서 혼자 기다려야 했는데(그렇습니다. 코로나가 유행하기 전에는 그런 시절이 있었죠.) 그 자투리 시간에 앉아서 노트북으로 웹서핑도 하고 이것저것 키보드를 두드리며 적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요구 조건을 정리해봤습니다. 13인치 맥북의 크기와 무게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크기는 12인치 이하면서 가벼워야 했어요. 또한 서피스 고에서 아쉬웠기 때문인지 화면과 키보드가 튼튼하게 붙어있기를 바랐죠. 한편 터치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어차피 대단한 성능이 필요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싸고 막 쓸 수 있는 플라스틱으로 마감된, 솔직히 어딘가 싼 티 나는 그런 노트북을, 그러면서도 웹은 잘 돌고, 뭔가 하나쯤은 신기해서 호기심을 채울 수 있는 물건, 성능이나 가격은 정말 조금도 오버하지 않지만 제 마음에는 쏙 드는 그런 물건이면 좋겠더라고요.

물론 가격이 제일 중요하다면 신품 가격이 20만 원 부근인 윈도 노트북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소소하게 쓸 거라지만 성능이 다소 걱정스러웠고, ‘평소 쓰던 컴퓨터인데 매우 싸다.’ 외에는 신기한 부분이 하나도 없었죠. 전혀 설레지 않았어요.

그러다 크롬북이 떠올랐습니다. 미국에서 굉장히 많이 쓰인다는데 왜 많이 쓰이는지, 과연 일상적으로 쓸만할지 늘 궁금했거든요. 이제 크롬북에서 안드로이드 앱도 돌아간다는데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보고 싶었고 말이죠.

당시 국내에서 크롬북을 구하려면 선택지가 몇 가지 없었어요. 해외 직구한다면 좀 더 그럴싸한 제품이 있었지만, 가격이 너무 거창해졌죠. 마침 중고 매매 사이트에서 적당한 제품이 보여서 살짝 검색해보고 구입한 것이 바로 이 HP 크롬북 11 G5입니다. 아마 택배비 추가해서 10만 원 조금 넘게 줬던 것 같아요.

그렇게 손에 넣은 노트북은 제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이 플라스틱으로 마감되어 있고 작고 가볍고 화면도 다소 흐릿하며 적당히 굼뜬, 유행과는 거리가 먼 녀석이었죠.

하지만 의외로 건실한 면도 많았어요. 중고가로 따지면 열 배는 더 비싼 맥북에도 없는 USB 포트가 두 개나 되고 HDMI도 바로 연결되는가 하면(이건 사실 맥북이 좀 너무한 거죠.), 좀 푹신하지만 키보드 치는 느낌도 나름 좋았어요. (이 또한 맥북의 나비식 키보드가 너무했죠.)

크롬 OS는 처음이었지만, 어차피 크롬은 익숙하잖아요? 거의 적응할 필요 없이 바로 사용할 수 있더라고요. 안타깝게도 성능이 좋은 편은 아니라, 안드로이드 앱을 이것저것 설치해보지는 못했지만, 크롬 브라우저 띄워서 웹서핑하고, 구글 문서나 스프레드시트, 구글 킵을 띄워 이것저것 확인하고 입력해 넣는 데에는 아쉬움이 없었어요. 게다가 유튜브!가 나름 멀쩡하게 돌더라고요. ‘현시대의 기기 수명은 유튜브를 원활하게 재생할 수 없을 때까지’라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유튜브가 잘 돌면 더 말할 것 없죠. 아이들이 만져도 부담이 없고요.

이 정도면 제게는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토요일이 되면,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한 시간 남짓 뜨는 시간 동안에는 으리으리한 맥북과 그램 노트북이 가득한 스타벅스에서 작은 크롬북을 꺼내놓고 이것저것 읽고 한 주를 정리하는 메모를 쓰곤 했습니다. 쓸 수 있는 건, 크롬, 구글 문서, 스프레드시트, 킵이 거의 전부였지만, 그걸로도 충분했어요. 아니, 오히려 다른 잡스러운 것들에 주의를 뺏기지 않을 수 있어서 더 좋았죠. 물론 좀 더 성능이 좋은 크롬북이라면 안드로이드 최신 게임들도 설치해서 같이 돌려볼 수 있었겠지만,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온전히 텍스트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더 충실한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아이가 토요일에 학원에 가는 것도, 학원에 있는 동안 기다리는 것도 이제 다 옛 얘기가 되어버렸어요. 덕분에 제 크롬북은 둘째 아이의 유튜브 머신으로 몇 달을 더 보람차게 살았습니다. 어느날 흥분한 아이가 내려쳐 액정이 망가지는 바람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지만요.

하지만,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없느냐가 중요’한 노트북을 쓰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었어요. 마치 미니멀라이프처럼 많은 것을 포기했지만 중요한 하나를 손에 넣고 ‘이만하면 충분해.’라고 즐기는 순간들이 있었죠. 어쩌면 그 경험을 꽤 오래 기억할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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